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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화)
[한겨레] [짬] 제정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한겨레] [짬] 제정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재천씨 






박재천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꼭 40년 전이다. 그때 유신 반대운동을 하던 청주 출신의 한신대 2학년생은 학교로부터 제적을 당했다. 판자촌에 스며들었다. 차마 시골의 부모님께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기숙사에서 나와 몸을 누일 곳을 찾아야 했다. 싼 곳을 찾아 찾아, 마침내 찾은 곳이 마장동 판자촌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보증금 3만원에 월세 5천원이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을 가르고 갈라 5~6가구가 함께 살았다. 마치 개미굴 같았다. 꿈많던 대학생에서 삶의 밑바닥으로 처박힌 절망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청년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고 제정구(1944~99년).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10살 연상의 형은 방황하던 그 청년의 일생을 결정해 주었다. 바로 도시빈민운동이었다. 현재 제정구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박재천(60·사진)씨는 “형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한신대시절 유신반대운동하다 제적 
가장 싼 곳 찾아가니 개미굴 월세방 
‘빈민운동 대부’ 따라 투신한지 40년

배달학당 청소년 야학지도로 시작 
독재정권·재벌 ‘철거야합’에 저항도 
‘제정구상’으로 아시아빈민운동 지원


그 시절 제정구씨는 청계천 판자촌에 살며 도시빈민들을 상대로 교육활동을 비롯한 인권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제씨는 자신의 유고집인 <가짐없는 큰 자유>에서 “청계천 뚝방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이런 현실도 모르면서 대학내에서 시위를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그런 제씨를 같은 마음으로 따라다니며 박씨는 판자촌 철거 반대시위를 비롯해 각종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배달학당에서 판자촌 청소년을 상대로 교육 활동을 했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공장에 나가 ‘공돌이, 공순이’로 살아가야 했던 청소년들에게 제정구 형이 만든 배달학당은 그들에게 희망이었어요. 검정고시를 보려는 청소년들에게 ‘야학’은 미래를 여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했어요.”

때로는 판자촌을 철거하려는 ‘폭력’에 거칠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달동네 판자촌은 독재정권과 재벌의 결탁으로 도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청계천이 개발되며 마장동 판자촌이 사라졌고, 동부간선도로가 깔리며 중랑천변의 판자촌도 사라졌다. 성산대교가 건설되며 양평동·문래동 판자촌이 사라졌고, 서부간선도로가 깔리며 안양천변의 판자촌도 사라졌다. 

“불량주택을 개선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결국 빈민의 삶터가 재벌의 부를 축적하는 기반이 됐어요. 마침 중동 건설경기가 내리막길을 걷자 현지에서 쓰던 중장비를 거둬들였어요.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지하철 건설과 산동네와 개천 주변 빈민지역의 재개발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재벌들은 빠른 자본 회전이 가능했고, 건설 경기 부양을 내세워 포크레인과 트랙터를 신나게 몰았어요.”

정부는 애초 ‘공영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판자촌 철거를 밀어부치다가 거센 저항에 부닥치자, 재벌을 끌여들여 ‘민관합동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판자촌 세입자의 주거권을 깔아 뭉갰다. 특히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은 폭력을 앞세운 판자촌 철거의 정점이었다. 1977년 제정구 형과 함께 중랑천 철거 판자촌 주민과 함께 ‘보금자리’투쟁을 펼쳤던 박씨는 93년부터 4년동안 서울 행당동 재개발 지역 6백가구를 조직해, 거설사·서울시·성동구청에 맞서 투쟁하며 신용협동조합·생활협동조합·소비자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 결과 100여가구가 임대주택을 ‘쟁취’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대부분의 판자촌이 사라진 지금, 박씨는 새로운 방향의 도시빈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제는 독거노인, 청소년 교육, 일자리 문제, 먹거리 등 다양한 방향으로 도시빈민의 자활을 돕고 있어요. 특히 주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지역사회 협동 민주주의’ 실천에 몰두하고 있죠.”

주민이 실제 주인이 되는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주민운동가’를 만드는 교육사업도 중요하다. “1970년대엔 비밀조직이었어요. 천주교와 개신교가 손을 잡고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사선)이 지역 운동가들을 육성하는 훈련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제정구 형과 빈민운동가 고 허병섭(1941~2012) 목사님이 사선의 지도자였어요. 96년 달라진 시대상황을 반영해 ‘주민운동교육원’을 개설해 제가 초대 대표을 맡기도 했죠.”

지금은 지역자활센터 실무자와 풀뿌리 지역운동의 활동가를 양성하고 있다. 저소득 주민이 스스로 재활할 수 있도록 협동조합 운동을 활성화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2007년 출범 때부터 계획했던 ‘제정구 상’을 마침내 올해 제정했다. 아시아지역의 빈민 운동가를 응원한다는 취지를 살려 지난 2월 첫 수상자로 타이의 아바윳 챤드라바와 제프리 윙에게 시상했다. 

“11월이 되면 빈민운동에 투신한 지 꼭 40년이 됩니다. 도시 약자들이 더 이상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그에게는 한 평생 한 길로 올곧게 살아온 삶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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