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박병구
2009/7/20(월)
참다운 길벗  
참다운 길벗  

 참다운 길벗

 

출처-오강남 저/현암사/2001.5.30

 

결국 예수를 바로 믿는다는 것, 참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기본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 그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류영모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 간디 옹, 틱냩한 스님 등 비정통적 그리스도인 내지 비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나 자신도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나 스스로는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성서학자의 말에 의하면, 신약성서에서 누구의 '제자'(disciple)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와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벗'이 된다는 뜻이다. 항상 그와 함께 다니며 그에게서 배우고, 결국엔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종래까지의 방법과 아주 아주 다를 수 있다. 종래까지는 내가 할 몫이란 그러 "밋슘니다!!"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이 다 해주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따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가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힘으로.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부활하는 엄청난 변화(transformation)를 체험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입술로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직접 그와 함께 길을 감으로 나도 이런 엄청난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가장 두드러진 일 두 가지를 들라면 '길 감'과 '함께 먹음'이라 보는 성서학자가 많을 정도로 예수님과 길 감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수님도 길을 가신 분, 예수님이 가신 길, 우리도 그런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이것이 예수 믿기의 핵심이다.
사실 거의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종교적 삶이 결국 '길을 감'이라 표현하고 있다. '길', '도(道)', '순례', '귀향', '탈출', '반본환원(反本還元)', '복귀', '본향', 등등의 표현은 모두 종교적 삶이 이런 '여정'(旅程)임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유명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마저도 모든 종교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가 바로 '근원으로 돌아감'(going back to the origin)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 감'은 종교적 수행과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 감'이란 무엇인가?
조셉 캠벌(JOseph Campbell)에 의하면 영적 모험을 감행한 동서양의 정신적 영웅이 간 길에 대한 여러 영웅담(hero myths)을 종합해보면 거기에는 크게 네 가지 대목이 있다고 한다. 1) 집을 떠나는 것(leaving home), 2)위험의 고비를 넘기는 것(threshold), 3)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ultimate boon), 4)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것(return)이 그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예수님과 함께 감도 대락 여기에 맞추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1) 길을 간다는 것은 물론 우선 '집을 떠나는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지리적인 뜻보다는 자기에게 익숙한 것, 인습적인 것, 일상적인 것, 영어로 해서 conventional한 것을 뒤로 한다는 정신적인 뜻이 중요하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당연히 여기는 고정관념, 상식적인 가치관, 통념 등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의미 있고 깊은 것을 추구해서 집을 나서는 것이다. 영어로 해서 subversive 한 태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뒤집어엎는 지혜'(subversive wisdom)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마커스 보그의 주장은 바로 예수님이 이런 인습적, 통념적, 고정관념적 가치관, 무엇이든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계관(taken-for-granted worldview)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길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가는 대로를 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가는 오솔길, 외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2) 이렇게 집을 떠난다 하더라도 어디 분명히 정해진 곳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떠나게 된다. 웬만한 용기와 믿음이 아니고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렇게 큰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떠났어도 수 없이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좌절감에 시달린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20)고 한 예수님의 심정이나, 다른 사람은 모두 집에서 즐겁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정처 없이 떠나야 하는가, 왜 "나 홀로 빈 털털이 같고, 바보 같고, 흐리멍텅한 것 같은가"(『도덕경』 제20장) 했던 노자의 마음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경우 가던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버리고 만다. '알지 못하는 것'(the unknown)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 소돔성의 영화를 못 잊어 뒤를 돌아본 롯의 처와 같은 이야기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신화적으로는 괴물이나 귀신 등이 나타나 위협하면서 가는 길을 막는 것으로 표현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직 정신적 탯줄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유치증 상태에서 편안을 느끼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영적 모험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위험, 시험, 유혹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이라는 것도 이런 성질의 것이라 볼 수 있다.

3) 오로지 영적 영웅, 믿음의 용사만이 이런 위험과 시험을 뚫고 이 길을 계속 간다. 그러다 마침내, 성서적 표현을 빌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새 땅에 발을 디딘다. 바빌론 포로에서 풀려나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체험이다. 좀 더 영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이 내게 임하시매"의 체험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혹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받으신 성령 체험이다. 옛 사람에게 새 사람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까지 당연히 여겨지던 것이 모두 다시 보이는 것이다. 인습적, 상식적, 통념적, 통속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윤리가 그야말로 완전히 뒤집어져 보이는 것이다. 자기의 이기적 이해관계에 얽혀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긴다. '실재'(reality)를, '진리'(Truth)를 직접 보게 된다. 실재와 하나가 되고 진리와 하나가 된 상태, 이분(二分)의 세계가 가고 하나의 세계에 들어선다. 조셉 캠벌에 의하면 'ultimate boon'을 얻는 일이요, "양그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체험하는 일이다. 너와 나, 피아(彼我)가 따로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바로 진리라." 선언할 수도 있고 "천상천하에 나밖에 없다."고 하는 말도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도달한 경지요, 세상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이르렀던 득도의 경지이다. 그야말로 '궁극변화'(ultimate transformation)가 일어난 상태이다.

4) 이런 경지,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 수가 없다. 남을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가 될 수밖에 없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웃이 당하는 고통이 바로 나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남과 고통을 함께 함, 곧 'com-passion,' '자비'의 마음은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이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예수님이 '자비'를 실천하셨고, 그의 가르침이 '자비'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다.
이렇게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이라고'여기는 사람은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인습에 젖어 하루하루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찾아가서 괴로운 사람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괴로움이 없는 세상,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울함이 없는 세상,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임하도록 하기 위해 힘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쓰는 일이다.
이렇듯 숭고한 작업, 하나님의 일은 인습적, 통속적, 이해관계에 얽매인 기득권 세력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세력이 굴하지 않는 자세-예수님은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 인류를 위한 일이라면 자기 한 몸을 사리지 않고 죽기까지 헌신하는 한 인간의 정신적 승리를 말해주는 인류사의 기념비적 상징이다.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