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같이 아름다운 저수지를 끼고 있는 산골마을,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에서 제정구는 태어났다. 키나 덩치는 또래 애들보다 훨씬 작았지만 완력은 대단한 지독한 개구쟁이였다. 호박에 대침놓기, 묘자리에 똥 누기, 고구마서리, 참외서리는 기본이었고 아예 고구마 서리 때는 검은 옷, 참외서리 때는 연두색 옷으로 위장하면서 형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올리곤 했다. 겨울이면 얼음덩이를 타고 산비탈을 씽씽 달렸고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불을 뿜는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니며 대자연속에서 가슴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그러나 이 밝은 시절은 6학년 추석 즈음 근엄하면서도 자상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의 마음에는 장난기대신 슬픔이 배기 시작했고 고집에는 독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들에서 농부들이 푸념처럼 부르는 모심기노래, 어머니의 길쌈하는 소리 심지어 농사 다 짓고나서 꽹과리 치며 부르는 풍년가까지 한결 같이 구성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겨울에 듣는 회심곡, 아버지 상여 나갈 때 부르던 소리…….
이런 것들이 가슴 밑바닥을 채울 때 그는 이미 빛나는
유년의 싸움꾼 시대를 끝내고 있었다.